세월이 흐를수록 빛 발하는 칠기공예
2003년 노동부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선정한 나전칠기 명장 김규장(49세. 크리스탈공방 대표)씨는 그가 창작한 나전칠기만큼이나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나전칠기 관련 6품목에 이르는 각종 특허를 획득 출원하였고, 3종목의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2000년 전승공예대전 금상 수상을 비롯한 각종 경연대회에서 13회나 최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60 여 차례의 국내외 전시를 통해 나전칠기의 저변확대 및 보급에 앞장서 왔다. 또한 각종 사회봉사참여( 표창장, 감사장 11회)와 기능의 활용과 보급에 앞장섰다.
30여 년 전, 18세의 김 씨는 형님이 운영하는 나전칠기 공방에서 칠기를 익혀 4년 후 독립하여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인정신 하나로 나전칠기 공예 기술개발 및 보급에 주력, 동분서주하고 있다.
자개전기인두(실용신안 특허등록 제0225216호)의 개발, 자개 부착(끊음)용 자동 상사칼(실용신안 특허등록 출원 20-2001-0012367)고안 및 실용화, 상감용 금속선 압착기(특허 의장등록 출원 30-2001-0012265)개발, 자개 위 시트지 부착공법 개발로 작업공정단축 및 품질향상, 연속무늬 채화작업을 위한 문양 판 개발과 실용화로 작업공정을 개선하여 숙련공이 아니라도 작업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작업공정 및 생산성에 20배 이상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제품의 품질 및 미적 수준의 월등한 향상을 가져옴으로써 2001년 서울시 신지식인에 선정되었다.
명지산업대학원 전통공예과를 수료한 그는 한국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감사,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이사, 한국옻칠문화연구원 상임이사로, 현재 김규장 명장은 예부터 나전칠기가 성하던 광진구 중곡동에서 크리스탈 공방(02-458-6767)을 운영하고 있다.
18세에 입문…30여 년 갈고 닦은 솜씨
나전칠기는 얇게 간 전복, 진주조개, 소라 등의 패각(貝殼)을 여러 형태로 잘라 칠을 바른 용기에 붙이고 그 위에 다시 칠을 바른 후 표면을 연마하여 문양을 드러나게 하는 공예품이다.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를 나무로 만든 기본 틀 ‘백골’에 붙여 각종 문양을 만들어 내는 끊음질과 자개를 실톱, 줄로 모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 두 가지 제작방법으로 섬세한 예술품을 만들게 된다.
칠기는 일찍이 서양에서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공예 기물이다. 그것은 칠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재료인 옻나무가 서양에서는 발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동양의 고대인이 이 칠을 발견함으로써 동양은 서양에서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칠기 예술이 약 4000년 전부터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달되고 있다.
모란문 12척 의장. |
우리나라의 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나전칠기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뚜렷한 유물이나 기록은 아직 없다. 다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평탈 기법의 목칠기물을 통해 신라 때 이미 나전기법이 존재하였고, 그것이 점차 숙련되어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당시의 세련되고 화려한 귀족문화의 성향을 반영하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고려 나전은 금속선을 꼬아 식물의 줄기나 문양사이의 경계선으로 장식하고 거북의 등껍질을 이용한 대모복채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의 나전칠기는 고려에 비해 세공의 정밀함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거칠고 소박하며 소탈한 자연관이 담긴 민중적 조형감각 기법으로 민속공예로 정착되었다.
오늘날의 나전칠기 공예는 금세기 초의 일제 침략과 새로운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혼란과 근래의 산업화로 말미암은 수공예의 낙후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재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스스로 행복한 칠기장인이라고 자처하지만 나름대로 애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전칠기에 응용되는 도안 자체가 워낙 광범위 해 산수화에서부터 초충도, 화조도, 인물화는 물론 현대에 맞는 도안까지 무궁무진하다. 그 광대한 도안을 혼자서 연구 ․ 개발해야 한다. 제작과 판매, 홍보, 영업에서 수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혼자 해야 되므로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토로한다. 김 명장이 가장 고심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현재의 칠기공예인들이 이런 부분을 극복하며 스스로를 계발해 나간다면,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즈음에는 전통공예인이 최고의 대우를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전칠기가 시대와 코드가 맞아가기 때문이다.
나전칠기는 심해에서 자란 조개껍질과 고산에서 자란 목재로 제작되므로 고산의 기상과 심해의 넓은 바다정기가 합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므로 가정에 소장하면 가족이 화합하고, 지위가 산처럼 높고, 마음과 재물이 바다처럼 풍요로워진다는 전설이 있어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왕족 또는 귀족공예품으로써 애용되어 왔다.
나전칠기는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보통 6개월 정도가 걸리는데 제작공정만 25여 가지로 세밀한 수작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장롱을 비롯해 화장대, 보석함, 교자상 등 각종 생활용품의 멋을 내는데 사용된 나전칠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제 색을 내는 옻칠의 특성으로 인해 세월의 무게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다. 때문에 나전칠기는 ‘대물림’의 공예품이기도 하다.
티 테이블/다과상/블랙홀'그릇(왼쪽부터). |
김규장씨가 30년 동안 나전칠기 기능인으로 살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대로 이어져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 나전칠기의 매력입니다. 저 역시 대물림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김씨는 9남매 중 막내로 1968년 학업을 위해 당시 나전칠기 공방을 운영하던 서울 형님 집에 머물게 된다. 그의 형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때 선물 제작을 담당했고, 이멜다 여사가 장롱을 구입해 갈 만큼 솜씨 뛰어난 장인이었다. 김규장 씨는 ‘공부’ 보다는 형님 몰래 공방을 드나들며 나전칠기 기술을 익히는데 더 열중했다. 결국 동생의 소질을 발견한 형님의 권유로 73년 기능인의 길로 들어섰다.
입문 4년만인 1977년 ‘칠성공예사’를 설립, 독립한데는 형님의 배려가 컸다. 형님에게 직접 기술을 전수 받으면서 초보는 감히 만져볼 수도 없는 기계를 초반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일테면 엘리트코스를 밟았다고나 할까, 남보다 일찍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나전칠기와 30년의 인연을 이어오면서, 김씨는 패각의 천연적인 무늬와 색상을 잘 나타내면서도 자연친화적인 다양한 재료와 새로운 기법 개발에 몰두했다.
고려시대 이후 계속 쇠퇴하는 나전칠기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모색, 전통을 살리면서도 대중성을 갖는 공예품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가구 ․ 액자 ․ 화병 ․ 그릇 ․ 녹차 잔 ․ 생활용품과 전통을 살린 관광 상품의 제작은 물론이다.
김 명장은 저렴하면서 세월의 무게만큼 가치를 더하여 대물림할 수 있는 명품을 만들어야만 나전칠기가 현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시향착오와 좌절을 딛고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아름답고 보배로운 물건은 이미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결정된다. 특히 천연의 재료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신의 은혜를 입은 천연의 재료를 잘 선택하여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은 공예인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매일 작업에 임하기 전 작업실에 걸어둔 이 글을 읽는다.
좋은 재료를 쓰며 작품에 과감한 투자를 서슴지 않기에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고, 그래서 인정받게 되었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천직이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괴로운 법인데, 좋아서 하다 보니 30년이 흘렀네요. 할 만한 사람이 한다고 주위에서 인정하니 저로서도 만족이고, 물질적으로도 불편 없이 살아왔습니다.”
‘제복이 군인을 만든다’고 명장이 되니 책임감을 훨씬 더 많이 느끼게 된다는 김 명장.
생계를 위해 상품을 만들 때에도 자신의 낙관이 찍힌 작품에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공예인의 명예를 담아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그는 우리나라보다 외국에 더 잘 알려진 장인이다.
세계적인 공예잡지 <Seven seas> 2001년 2월호는 김규장씨의 작품세계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화병. |
그의 작품은 국내와 해외 전시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세계 유명 숍에서 작품제작을 의뢰해 온다. 일본으로 매년 8천만 원 상당의 수출을 하고 있고, 일본인들이 동호회를 만들어 찾아와 작품의뢰를 한다. 심지어 국내 유명 연예인도 일본에서 소문 듣고 찾아와 작품을 의뢰 할 정도다,
사람의 인연이란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김규장 명장.
작업환경이나 시설을 최고로 갖추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긴다. 나전칠기는 귀족에게 사랑받던 공예품이니 그것을 만드는 공예인 자신이 먼저 정신적으로 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전칠기가 귀족에게 알려진다고 생각하는 그다.
“나전칠기를 알리기 위해 나름대로 귀족운동 열심히 했지요.” 맑은 모습에서 나온 의미심장한 말이다.
IMF때 50명의 직원을 감원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매달 1억여 원 씩 손해를 보면서도 직원들이 스스로 직장을 찾아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돈은 필요한 만큼 있으면 된다. 내가 남을 도왔을 때 내 마음이 편한 것이지, 그 사람이 좋으라고 도운 것 아니다. 종국에는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김 명장이다.
현재 김명장의 칠기사에는 삼십대에서 사십대 중반의 직원 일곱 명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은 곧 최고의 삶을 이루는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그에게서 올곧은 장인의 모습을 본다.
민족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려면 장인들이 후배들을 제대로 가르쳐 능력 있는 기능인을 많이 육성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 배우고자하면 열심히 가르쳐주고 각종 매스컴과 미디어, 국내외 전시회를 통해 나전칠기를 소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나전칠기가 장식품이 아닌 실생활에서 애용되고 골동품으로 대물림되어 유산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고려나전 우수성·진가 알리기 몰두
자개동선대모어피용봉무늬 이층롱. |
특히 고려나전의 우수성을 복원하기 위해 문헌을 뒤져 기법과 재료를 그대로 활용하고, 중요무형문화재 심부길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여러 무형문화재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2000년 제 25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나전, 대모(거북의 등껍질), 어피(상어껍질), 금속선을 이용한 ‘자개동선대모어피용봉무늬 이층롱’으로 최고상인 금상을 차지하며 나전칠기의 우수성과 가치를 확인시켰다. 홍송 표면에 삼베를 바른 후 골회와 생칠 바르기를 반복 ․ 연마한 뒤 흑갈색 옻칠을 한 이 작품은 고려나전칠기의 대모전과 어피, 자개를 이용한 용과 봉황, 구름 문양이 특색이다. 또한 그 해의 간지인 용 문양과 대통령의 문장인 봉황무늬를 구름문양과 어우러지게 사용함으로써, 용의 해를 맞이하여 조국과 민족이 크게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이어 200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통공예 공모전에서 0.2㎜ 정도의 금 ․ 은판의 문양 위에 옻칠을 하고 연마해 화려한 문양이 나타나게 하는 ‘금은평탈칠기’를 통해 최고상인 산업자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자연친화적인 소재의 발굴과 새로운 가식기법을 찾는 일이 평생의 과제라는 김규장 명장, 생각나면 곧 실천하는 것이 그의 모토, 따라서 그는 새로운 작품을 많이 한다. 기본 틀에서 벗어난 획기적이고 특별한 작품을 뜻한다.
2002년에는 칠기공예의 화려함과 매듭공예의 우아함을 접목한 전통 노리개 및 장신구를 개발하여 문화상품화 하였다.
김규장 명장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인천국제공항 귀빈실에 설치된 대형 나전칠기 벽화다. 높이 2m40cm, 폭이 8m80cm인 이 ‘군학도’로 국제 귀빈들을 한국의 첫 관문에서 천년의 기술로 이어진 우리 전통공예의 아름다움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고 문화적인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인천국제공항 귀빈실 '군학도'. |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는 고려 때 더욱 발달해 도자기 공예와 더불어 대표적인 고려의 공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우수성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고려나전의 진가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계적인 칠기인 고려나전이 고작 14점뿐인데 그것도 외국에서 소장하고 있어 아쉽지만, 칠기는 단연 우리가 원조라고 강조하는 김 명장.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나전의 색이 유난히 아름다워 나전칠기가 발달하게 되었고, 칠을 내는 옻나무 역시 우리 것이 최고라고 김 명장은 말한다.
김규장씨는 자개의 천연색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친화적인 소재와 새로운 기법을 찾는일이 자신이 평생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재료는 40여 가지의 조개껍질을 비롯해 물소 뿔, 대모라고 불리는 거북이 등껍질, 철갑상어 껍질, 상아, 금 ․ 은을 실로 꼬아 쓰거나 가루를 내고 판 상태는 물론 종이처럼 얇게 밀어 사용한다. 옥충이라 불리는 비단벌레나 광대노린재 같은 곤충도 재료로 사용한다. 이런 탓에 그는 재료를 고르는데 무척 까다롭다. 또한 이런 자연친화적인 재료들은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좋은 재료가 있으면 값을 논하지 않고 구입해 작품에 적용한다.
자개/물소뿔/상어껍질 비단벌레와 광대노린재/상아/거북이 등껍질(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최근에 그가 몰두해 있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작품을 만들고 남은 폐 자개를 이용한 건축용 타일을 제작하는 일이다. 재활용과 환경보호라는 이중의 메리트를 가진 이 자개타일은 이태리 타일보다 더 실용성이 있고 고급화된 것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욕실 등에 두루 이용할 수 있으며, 물과 불에 모두 강하다는 장점을 가진 것으로 발명특허출원 중에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나전 소파를 만드는 일이다.
이집트 여행에서 투탄카멘을 보고 영감을 얻어, 나전으로 소파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의자의 뼈대인 백골의 쿠션상태만 해결되면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빛나는 나전 소파를 필생의 역작으로 만들 예정이다.
나전이란 오랜 동안 사용해도 형태나 색이 불변하는 골동적 가치를 지니는 공예품이다. 세월이 갈수록 더 진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나전의 매력이자 특성이기에 그는 또 나전 소파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그는 국립중앙박물관 연구반을 6년째 다니고 있다. 옛 제작기법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익혀서 활용하기 위해서다.
"나전칠기 전문박물관 세우고파"
나전칠기가 천직이라는 그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바로 나전칠기 전문박물관 건립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나전칠기를 시대별 유물, 재료, 도구 등을 전시해 누구나 그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한다면 후대에도 고려시대처럼 생활 공예의 중심에 나전칠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좋아서 하는 칠기 일 외에 취미라곤 여행이 전부지만, 그나마도 칠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해외에 나가 칠기를 살펴보고 구입해 와 연구 자료로 쓰고 박물관을 위해 차곡차곡 모아둔다.
그는 또 자개제품이 있는 곳이라면 시간과 거리를 마다 않고 달려가 수집하고, 나전칠기역시 시대별로 모아두고 있다. 공방에서 얻은 수익을 박물관에 전시할 작품 수집하는데 아끼지 않아 고가의 희귀종도 사 모았다. 인간문화재의 작품도 골고루 수집하고 자칫 해외로 빠져나갈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나전칠기 전문박물관을 세워 우리가 전통을 지키는 국민이라는 문화적 자긍심이 저절로 생겨나도록 하고 싶기 때문이다.
<홍 창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