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마비, 교통사고 후유증 딛고 두 딸 출산한 배은주씨
세상은 그녀에게 뭐든 ‘안 된다’고만 했다.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가고 싶은 곳도 가지 못했다. 배은주씨가 남들과 다른 건 두 다리가 불편한 것뿐이었다.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출산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금지’의 틀을 깨고 드디어 본모습을 찾았다. 그녀에겐 보석 같은 아이들이 있을뿐더러 현재 칼럼니스트, 라디오 DJ, CCM 가수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들 보시오. 그녀는 아주 빛나는 재주꾼이었단 말이오!
편견을 딛고 결혼과 출산
그녀의 임신 소식을 접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그들에게는 분명 ‘염려’였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어쩌면 ‘저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배은주씨(40)는 중증 장애인이다.
어릴 적 후천성 소아마비를 앓아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다. 요즘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녀가 젊었던 20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장애인이 살아가기엔 너무 불편한 세상이었다. 배은주씨는 세상과 철저히 단절됐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모든 교육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가혹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퇴근 길 신호를 대기 중이던 그녀의 차를 맞은편 중앙선에서 넘어온 차가 덮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척추에 핀을 박는 큰 수술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운전대도 잡을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영영 걸을 수도 없게 됐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에게 한 줄기 빛처럼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무릎 물리치료를 위해 같은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던 그는 어느 순간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었고, 식사를 챙겨주었다. 1년간 묵묵히 자신을 보살피는 그에게 배은주씨도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열었다. 5년이 넘는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축복을 받아도 시원찮을 마당에 배씨는 또 한 번 반대에 부딪혔다. 친정 식구들마저도 ‘그냥 혼자 살면 안 되겠느냐’고 청할 정도였다. 혹여 상처받을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올해로 우리가 만난 지 18년이 됐어요. 그렇지만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안 들어요. 첫 만남과 지금이 온전히 같아요. 남자들은 그렇잖아요, 연애 때는 잘 보이려고 정성을 다하다가 결혼하면 달라진다고. 그 사람은 제게 늘 한결같아요.”
주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남편은 늘 그녀를 아이 돌보듯 보살펴주는 자상한 사람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출산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어김없이 또 반대했다. 어찌나 거센지 결혼 당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는 편이 몸에 좋다고 권고했다.
“저 같은 사람은 출산시에 전신 마취가 필요해요. 그동안 거듭되는 수술 때문에 전신마취를 10번이나 했어요. 마취는 하면 할수록 마취제 양이 늘어간답니다.”
그러나 출산에 대한 그녀의 의지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드디어 결혼 2년 만에 임신에 성공했다. 드라마에서만 등장하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내 뱃 속에 생명이 있다니, 꿈만 같았다.
“남편와 연애를 할 때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어요. 그런데 엄마가 되다니!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죠.”
그녀는 제왕절개를 통해 첫딸 예지를 얻었다. 몸무게는 2.5kg밖에 되지 않았지만 건강했기 때문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질 필요가 없었다.
아이 건강에 대한 강박관념들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제 병이야 후천적인 것이지만, ‘혹시나 내 아이도?’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머릿속이 어지럽혀졌어요. 조금만 기침을 해도 바로 종합병원으로, 울기만 해도 응급실로 달려갔어요. 결국 남편이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내더군요(웃음).”
자라면서도 걱정은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첫딸 예지는 걸음이 늦은 편이었다. 주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이웃집 엄마는 돌이 지났는데도 걷지 못하는 아기를 두고 병원에 가보라며 그녀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아기들 성장 속도는 조금씩 차이가 나는 법인데도 말이다.
“요즘 아기들은 거의가 돌 전에 걷는데…. 애도 엄마처럼 못 걸으면 어떻게 해요?”
배은주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곧 이웃집 엄마에게 “나는 선천적인 장애인이 아니다. 후천적, 정확히 세 살 때 소아마비로 인해 병이 생긴것이다”라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웃집 엄마는 별 말 없이 딸아이의 다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실은 육아를 할 때 몸이 피곤한 건 둘째였어요. 가장 힘든 건 생각 없이 던지는 이웃들의 말이었죠. 그게 가장 상처가 됐어요. 1, 2년 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자리하고 있어요.”
수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배은주씨는 깜짝 놀랐다.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리번거리며 찾다 그녀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베란다에서 아이가 방긋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걷는구나, 우리 아기가 드디어 걷는구나! 아기가 생글거리며 나를 향해 오는 거예요. 저는 얼른 수화기부터 들었어요. 사람들에게 예지가 걷는다며 함성을 질렀어요. ‘그것 봐 걱정할 일 아니었지?’라고 말이죠.”
예지는 ‘엄마 이것 보세요. 저 걸을 수 있잖아요’라고 말하며 걸어오는 듯했다. 딸아이가 걷기 시작하자 그녀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정오 무렵에는 함께 산책을 즐겼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비스킷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유모차를 모르는 아이들
첫째 딸 예지는 언제나 혼자 놀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녀는 차츰 둘째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쉽게 둘째 출산을 결정할 수 없었어요. 첫아이를 가졌을 때 너무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예지가 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게도 5년 만에 둘째가 생겼어요.”
한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던 탓에 이번에는 장애인 진료를 많이 한다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열 달 동안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지내라던 다른 의사들과 달리 평상시와 같은 일상생활을 해도 된다는 기쁜 이야기를 들었다.
“임신은 병이 아닙니다. 평소와 같이 일상생활 하셔도 됩니다.”
더군다나 그 병원에서는 진찰대 의자를 최대한 낮춰주는 등 배씨에게 많은 배려를 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의 편안한 진료로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졌다.
“이상적인 태교는 엄마의 마음이 즐겁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큰아이는 유난히 소심하면서 말수가 적어요. 아마도 내가 임신했을 당시 늘 불안해하며 집 안에서 조용한 음악만 듣고 지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둘째 임신 때는 내내 바쁘고 분주하게 지냈다. 큰아이를 데리고 발레를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저녁이면 아이를 붙들고 앉아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마 아기가 뱃속에서 ‘우리 엄마는 무척 시끄러운 사람이구나’ 생각했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태교는 클래식 음악이나 자연의 소리보다 가족 간의 화목한 대화 소리예요.”
둘째 아이 예슬이는 더욱 건강하게 3.5kg로 태어났다. 모유 수유도 하루 만에 성공하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기어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였다.
“그래도 늘 업어주지 못하는 게 가슴 아파요. 우리 아이들은 업어준다는 개념을 잘 몰라요. 한 번도 업혀본 적이 없으니까요. 유모차도 끌어줄 수가 없었죠. 기어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해서 유모차를 받았지만, 우리에겐 쓸모가 없어서 그냥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무엇보다 가장 힘든 일은 외출이었다. 아이는 10개월만 되면 밖에 나가고 싶어 한다. 울고 떼를 쓰다가도 바깥 공기를 쐬면 울음을 그치는 게 아이들인데 그녀 혼자 힘으로는 아이들과 외출할 수 없었다. 오직 아이가 스스로 걷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모유는 철저히 먹였어요. 비장애인 엄마들이 힘들다고 분유 먹이는 걸 보면 정말 이해가 안 가요. 공해나 환경이 심한 세상에 모유만한 천연 식품이 없는데 말이죠. 일주일 정도만 고생하면 누구나 건강하게 모유를 먹일 수 있어요.”
그렇게 자란 둘째 아이 예슬이의 버릇은 땅에 떨어진 물건 줍기다. 전동 휠체어 위에 앉아 생활하는 엄마가 무언가를 줍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걸까?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무조건 줍기 시작했다. 내려놔야 할 것까지 주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길에 버려진 쓰레기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때로는 불편한 그녀의 몸이 아이들 인성교육의 계기가 되곤 한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희망은 있다!
배은주씨는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란 걸 늘 아이들에게 강조한다. 아이들 생일이면 일부러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한다. 자연스럽게 엄마의 장애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고 싶다.
“선배 ‘장애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운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방황하고 힘들어한대요.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거나 엄마와 함께 외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더군요.”
다행히 두 아이들은 무척 밝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예지는 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생겼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엄마가 자주 학교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성장 속도가 빨라 5학년이면 사춘기가 온다는데 예지는 엄마의 장애에 대해 별 스스럼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저는 힘들 때마다 일부러 감추려 하지 않아요. 오히려 도와달라고 해요. 그렇게 하면 밖에서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자연스레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상처받는 일이 없을 순 없다. 그런 기억은 머릿속 지우개가 있다면 싹 지워주고 싶다. 어느 날 배은주씨가 아이들과 외출해 택시를 잡아야 할 상황이 생겼다. 그날따라 어찌나 택시 인심이 야박하던지. 모녀는 1시간이 넘게 붕 하고 도망가는 택시 뒤꽁무니만 바라봐야 했다. 그날 저녁 긴장한 탓이었는지 딸아이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엄마를 두고서 달아나던 그 많은 택시들은 잊어주기를. 아니 아예 기억하지 말아주기를….”
그래도 이 세상은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곤경에 처한 누군가에게 서슴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그날 밤새도록 수많은 택시들이 저를 두고 도망가는 꿈을 꾸었어요. 전 굉장히 긍정적인 성격이라 부부싸움을 해도 금세 잊어버리고 화를 못 내거든요. 근데 그날 일은 참 오래도록 잊혀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녀는 원래 굉장히 밝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1996년 ‘제1회 KBS 장애인 가요제’에 출전해 은상을 수상했다. 이후로 장애인 예술단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2개 도시 순회공연을 다니는 한편 많은 무대에 섰다. 지금은 ‘에이블뉴스’ 인터넷 사이트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며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KBS 제3라디오 ‘소리로 보는 세상’의 메인 MC를 맡은 적도 있다. 최근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엄마들의 육아 일기를 엮은 책 「엄마, 나 낳을 때 아팠어?」(P당)를 내기도 했다. 게다가 10월에는 ‘Bitdoensori(세상에 빛이 되는 소리)’라는 팀명으로 1집 음반을 발매한다. 앨범에는 그녀의 솔로곡과 둘째 예슬이와 부른 동요가 들어갈 예정이다.
“KBS 장애인 가요제 입상자들이 모여 팀을 만들었어요. 요즘 다들 힘들잖아요? 모든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노래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기획했어요. 사진이 취미인 남편이 앨범 표지를 찍어주고 제가 모든 곡의 가사를 썼어요. 그리고 좋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죠.”
그녀는 앨범 제작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결국 문화예술위원회에서 후원금을 받아 앨범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포크밴드 ‘나무자전거’도 직접 섭외해 앨범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배은주씨는 늘 생각한다. 남들이 그렇게 반대하던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아이들의 엄마가 된 일이에요. 세월이 흘러 내 아픔이 아이들의 아픔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한편으론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엄마가 나란 걸 자랑스러워할 거라 믿어요.”
그녀는 볼수록 예쁜 미소를 가졌다.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원망이나 불평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는 아마도 그럴 시간에 자신이 타는 네 바퀴 전동 휠체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을 것이다.
“떡볶이 드시고 가세요! 제가 사올게요.”
인터뷰가 끝나자 뭐라도 먹고 가라고 살갑게 붙잡는다. 함께 사러 가자고 해도 굳이 집에서 기다리란다. 그게 도와주는 거란다.
“제가 전동 휠체어 타고 쌩하고 달려가서 사올게요. 저, 얼마나 빠른데요!”
따끈따끈한 떡볶이, 순대, 김밥 한아름을 안고 온 그녀. 지금까지 먹었던 떡볶이 중 가장 맛있게 먹은 떡볶이로 기억될 같것다.
레이디경향 200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