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진주

´이제는 해녀 차례´ 유네스코 유산 등재 총력

maind 2009. 7. 16. 11:41

 

 

 

 

 

 

‘바다 속을 아는 사람은 해녀들뿐입니다. 그들 때문에 제주바다는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물질을 했다는 제주수협 하도어촌계 임백연 계장은 해녀들의 초인적인 삶은 가정과 제주경제를 일궜다고 했다.

 

 

 

작살로 고기를 잡은 해녀 최진연

 

 

제주전역에는 5000여명의 해녀가 있지만 실제 물질하는 해녀의 수는 알 수 없다. 그중 구좌읍 하도리 지역에만 400명이 바다 속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있고, 하도리어촌계서 밝힌 연간소득만 16억 원에 이른다.  

 

현재 물질하는 대부분 여인들은 60~70대가 중심이다. 해녀들은 대를 잇기도 하고 어릴적 부터 이 일을 한 경우도 있다.

대체적으로 15살께 물질을 시작해 평생 가계경제를 도왔지만, 이제 해녀는 시대에 밀려 감소하고 고령화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제주소라를 보여 주는 해녀 최진연

 

 

제주해녀들의 전설적인 것은 물질하는 기량이나 의지가 초인적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장비 없이 바다속 20m까지 들어가 2분이나 견디면서 소라, 전복, 미역 등 해산물을 캘 수 있다.

30여년 물질을 하고 있다는 하도리에 살고 있는 고명순 씨(53)는 "한 달에 15일정도 바다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밭일 또는 다른 일로 생활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서울서 직장 다니고 있어 걱정 없다고 했다. 추운 겨울에도 해산물을 캐낼 정도로 내한력도 있지만, 특별한 체질이 아니라 수련에 의해 단련된 것이라고 했다.

 

해녀 그녀들은 제주여성의 상징이다. 또한 전국 각처와 일본 등지로 원정을 다니면서 제주경제를 일궜고 일제의 수탈에 맞서 항일운동을 한때도 있었다.

짙푸른 바다에 뛰어드는 물질작업, 일을 끝내고 불 턱에서 정담을 나누는 장면 선별과 수매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발길, 물질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면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생성, 전승시켜온 제주해녀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해녀박물관은 수년째 노력하고 있다.

 

좌혜경 박사(해녀박물관 학예실)는 "제주해녀들의 물질 활동은 탐라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다.

 

3000년 전 유적인 북촌리 바위그늘 집 자리에서 전복이 발견된 것을 볼 때 기원전 3세기 까지 올라간다. 해녀관련 기록은 다양하다"면서 "고려 이전의 기록은 주로 해녀들의 채취물인 진주나 혹은 전복 등 조공과 관련된 기록이 주종을 이룬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13년(504)에는 고구려가 탐라국으로부터 진주로 보이는 '가옥(珂玉)'을 수입하여 북위(北魏)에 조공을 바쳤던 기록이 전하고 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문종(文宗) 33년(1079)에 '탐라 구당사(勾唐使) 윤응균(尹應均)이 큰 진주 두 개를 바쳤는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야명주(夜明珠)라고 불렀다'며 진주가 탐라의 조공품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충렬왕(忠烈王) 2년(1276)에는 '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탐라의 진주를 채취하게 하였으나, 이를 얻지 못하자 탐라 백성들이 갖고 있던 100여 개의 진주를 탈취'하여 원나라로 돌아가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이원진의 <탐라지>등의 개인 문집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묘사되며, 시(詩) 혹은 설(說)로서 해녀들의 고역에 동정을 보내는가 하면 특히 관(官)에 납품하는 전복 등 해산물의 착취가 심했던 사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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