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때문에 힘들었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에 늘 행복했다” |
흔히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유선 박사는 2004년 뇌성마비 장애인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모교인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한 남자의 아내이자 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장애를 이겨내고 꿈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정유선 박사의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 |
밤새 체력장을 연습하던 악바리 소녀
지난 11월 말, 정유선(38) 박사는 그녀가 집필한 책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대교북스캔)의 출간 기념회에 맞춰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지난 2007년 공동저자로 참여한 「첫 아이」 출간 이후, 두 번째 책이다.
경기도 일산, 정 박사의 친정집에서 만난 그녀는 밝고 따뜻한 웃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두 모녀의 화사한 웃음이 닮았다고 생각하던 중, 거실 한쪽에 걸려 있는 ‘이시스터즈’의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어머니 김희선씨는 1960, 7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라는 노래로 높은 인기를 끌었던 여성 트리오 ‘이시스터즈’의 멤버였던 것이다.
김씨는 1961년 이시스터즈로 데뷔, 결혼 직후인 1973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출산 후 딸의 ‘뇌성마비’ 판정을 듣고 불편한 딸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연예인 활동을 그만뒀다. 하지만 그 딸이 이제는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의 교수가 됐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훌륭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두 살 때 신생아 황달로 인한 뇌성마비 판정을 받은 정유선 박사. 어머니 김씨는 항상 딸에게 “넌 할 수 있다”는 말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 뛰어놀지 못하는 딸을 위해 매일 집에서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 덕분에 김씨는 지금까지 33년 동안 동화구연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정 박사는 “가끔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뻐근하다”며 “부족한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꿈을 포기하셨던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정유선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오히려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딸의 강한 의지 덕분”이라며 딸을 추켜세운다.
“유선이는 정말 악바리 같은 아이였어요.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한번은 제가 ‘공부하는 게 그렇게 재밌니?’라고 물어봤을 정도예요. 또 ‘체력장’이 있는 날이면 밤을 새서 몸이 따라주지 않는 체력장 연습을 해요. 안 된다고 포기하는 법이 없었죠.”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정 박사는 초·중·고등학교 시절 학과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학입시 면접시험에서 떨어졌다. 대학입시에 좌절한 그녀는 아버지의 유학 권유를 받고 흔쾌히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정유선 박사와 남편 장석화씨
그리고 아들 하빈(10)과 딸 예빈(6)
언어장애, 보조기기로 자유를 찾다
토론 수업을 할 때 그녀가 큰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학생들은 “I can’t hear you(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어)”라며 짜증내듯 말했다. 그녀는 점점 더 영어를 못하게 됐고 사람들과의 대화는 더욱 단절되어갔다. 그녀는 매일 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죽고 싶다’며 자학했다.
이렇게 스트레스와 좌절 속에서 헤매던 그녀에게 인생의 희망을 느끼게 해준 것은 바로 ‘보조기기’와의 만남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전공을 바꾸었다. 장애인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보조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보조기기 중에서 드디어 그녀에게 딱 맞는 보조기기를 발견했고 그 보조기기 덕분에 학생들 앞에서 강의도 할 수 있게 됐다. 이 보조기기는 하고 싶은 말을 자판에 치거나 입력한 후 엔터 키를 누르면 ‘음성’으로 바뀌는 원리를 가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 박사 스티븐 호킹과 슈퍼맨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리브 등이 이 보조기기를 사용한다.
정 박사는 ‘보조기기’를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기자를 위해 방에서 컴퓨터에 달린 보조기기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치고, 엔터 키를 누르니 영어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저도 보조공학을 전공하기 전까지는 이 기계에 대해 알지 못했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이 보조기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제가 책을 쓴 목적도 한국에 이런 보조공학을 많이 소개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도 저처럼 보조기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정 박사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보조기기를 개발할 수 있지만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만들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정 박사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길을 가다 장애인과 마주쳤을 경우, 미국은 10명 중 1, 2명 정도가 뒤돌아서서 장애인을 바라보고, 우리나라는 10명 중 7, 8명이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깊다는 뜻이다. 그녀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뇌성마비 장애인 중에는 돈을 갖고 물건을 사기 위해 문구점을 찾았음에도 주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사실 2004년 박사학위를 받고 매스컴에서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제 주변의 뇌성마비 장애인 언니가 ‘단 한 명이라도 너의 이야기를 듣고 희망을 갖는다면 넌 성공한 인생이야’라고 말하더군요. 제 이야기가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울릉도 트위스트’를 불렀던 ‘이시스터즈’의 멤버였던 어머니 김희선씨(사진의 오른쪽). 보조기기를 보여주고 있는 정유선 박사.
“우리 엄마는 정말 훌륭하고 유명한 사람”
정유선 박사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을 뿐만 아니라 멋진 한국인 남편을 만나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낳은 엄마이기도 하다.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바로 단짝 룸메이트의 소개 덕분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촌오빠를 소개시켜주겠다던 룸메이트의 제안.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정 박사는 남편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녀의 남편은 이날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위로해주던 정 박사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남편은 항상 제 뒤에서 듬직하게 서포트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줘요. 항상 내 곁에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참 좋더라고요.”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됐고,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남편의 부모님보다 정 박사의 어머니인 김씨의 반대에 부딪혔다.
“유선이가 어느 날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다고 전화를 했어요. 저희 부부는 평생 유선이가 결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평생 같이 살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생각지도 못했던 엄마의 반대에 부딪힌 정 박사는 남편과 함께 한국행을 결정하고 부모님을 찾았다. 하지만 어머니 김씨는 한국에 온 두 사람에게 “결혼은 안 된다”며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미국으로 돌아간 정 박사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왜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10장의 편지지에 적어 어머니께 전했다. 결국 이 편지를 받아본 김씨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줬다고 한다.
“사실 유선이가 결혼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아이는 낳을 수 있을까, 학부모로서 잘 키울 수 있을까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니까 사위가 참 좋더라고요. 지금은 아이들도 두 명이나 낳고 잘 살고 있으니, 정말 부모로서 바랄 게 없죠.”
정 박사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언덕을 넘고 난 후, ‘아이’를 갖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엄마가 된다는 건 그녀에게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임신을 하면 열 달 동안 배 속에서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출산은 잘할 수 있을까, 또 아이는 잘 키울 수 있을까, 아이가 엄마의 장애 때문에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등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아이를 가졌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 하빈이를 자연분만으로 얻었다. 올해 열 살이 된 하빈이는 이 세상 누구보다 그녀와 마음이 잘 통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정 박사는 하빈이가 엄마의 장애에 대해 처음 알던 날을 기억한다. 2006년 2월 어느 날이었다.
학생들이 정 박사의 수업을 듣고 제출한 수업 평가서에 ‘Excellent(매우 잘함)’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스럽게 생각한 하빈이가 “엄마는 영어로 말할 때 입꼬리를 올리면서 ‘Cranky(불안정)’하게 말하는데, 왜 학생들의 수업 평가서에는 ‘Excellent’라고 되어 있냐”고 물었다.
정 박사는 드디어 아들에게 엄마의 장애에 대해서 이야기해줘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는 뇌성마비라는 장애가 있다”고 설명해줬다. 그리고 “뇌성마비는 수술을 해도 고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들은 한동안 걱정스러운 표정이더니 이내 “괜찮아. 엄마는 장애가 있지만 다른 엄마와 똑같고, 공부를 잘해서 박사도 됐고,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훌륭한 사람이니까”라고 답했다.
이어 정 박사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은 건 한국에서 처음이기 때문에 매스컴 인터뷰를 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다음부터 아들은 누굴 만나더라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우리 엄마는 정말 훌륭하고 유명한 사람이야”라고 자랑한다.
“장애가 있는 엄마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해주는 아들이야말로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이고, 자유롭지 못한 육신 안에서도 제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하빈이 이후, 그녀는 또 한 번 아이에 대한 욕심을 냈다. 그리고 올해 여섯 살이 되는 딸 예빈이를 낳았다.
신생아 황달로 두 살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정유선 박사는 장애를 기피하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외롭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늘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는 가족이 함께 했다.
딸을 위해 연예계 활동을 그만둔 어머니를 비롯해 “유선아, 네가 자라면 집을 한 채 지어주마. 거기서 너는 너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거라. 아버지는 그 집의 수위를 할게”라며 무한한 사랑을 주신 건축가 아버지, 또 장애가 있는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던 오빠와 그녀를 창피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꼭 잡고 학교를 다니던 남동생, 그리고 결혼 후 나무처럼 든든하게 그녀 곁을 지키는 남편과 그녀를 웃게 만드는 원동력인 사랑하는 아들과 딸.
정유선 박사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든든한 가족 덕분에 늘 행복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에요. 저처럼 장애가 있는 많은 사람들 역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 그래야 주변 사람들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루하루를 작은 기적을 이루면서 살고 있는 정유선 박사의 해맑은 웃음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레이디경향 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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