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7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는 이성과 과학이 통하지 않고 극한 체험이 무시로 일어나는 곳이다. 히말라야 산맥을 ‘신(神)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중 8000미터급 고봉 14좌는 남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죽음의 지대’.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등반에 도전하는 산악인 고미영은 등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가지 않은 길’에서 만난 인연
“원래는 2011년까지 등반을 목표로 했는데 2010년까지 이루고 싶어요. 2년 동안 7개를 올랐으니 나머지 7개도 2년 동안 오르고 싶습니다.”
다른 산악인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등반을 시작한 그녀는 한국 여성 산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농림부 공무원시절 시작한 클라이밍(암벽등반)으로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스포츠 클라이밍 세계 랭킹 5위에 오른 이색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처음 산과 인연을 맺은 사연도 특별하다.
“공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가평에 있는 명지산으로 야유회를 갔어요. 그때가 봄이었는데 무척 좋더라고요. 그 뒤로 혼자서 배낭을 메고 전국 여기저기 찾아다녔죠. 처음에는 당일치기로 다녔는데 그렇게 다니다 보니 산에서 자고 싶어지더라고요. 텐트를 치고, 하루 이틀 혼자 야영을 하다 일주일 내내 산에서 자기도 하고…. 산이 좋았어요.”
산속에 혼자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남들은 폭포 옆에서 자면 이상한 환청이 들린다고도 하던데 무서운 것 전혀 없이 그저 좋기만 했다. 산속에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길이나 아예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을 찾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북한산에 갔을 때였어요. 길이 두 갈래로 나 있는데 왼쪽으로는 백운대로 향하는 등산로였고 오른쪽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죠. 오른쪽 길로 갔다가 그곳에서 암벽 타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렇게 암벽등반을 시작하게 됐죠.”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일화다. 그렇게 시작한 암벽등반의 매력에 푹 빠진 그녀는 암벽등반을 위해 10년 넘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로 등반 유학을 떠난다. 그때가 1997년, 그녀 나이 서른 살이었다.
"주위에서 만류를 많이 했죠. 12년 동안 직장생활 잘 하다가 서른이 넘어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가족의 반대가 심했어요. 클라이밍 대회가 대부분 유럽에서 열리거든요. 이미 한국에서는 우승을 여러 번 했고 좀 더 큰물에서 경험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공무원 생활은 10년이고 20년이고 할 수 있지만, 클라이밍은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클라이밍으로 먹고살 자신도 있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어요. 두려움 없는 선택이었죠.”
2년 만에 히말라야 7개좌 정복, ‘여자 엄홍길’
그녀의 확신은 적중했다. 1997년 아시아챔피언십 클라이밍 대회에 출전한 이후 이 대회에서만 6연패를 달성하고 세계 랭킹 5위까지 올랐다. 그렇게 2004년까지 11년 동안 암벽등반가로 활약하다 함께 암벽을 타던 또래 선수들의 은퇴를 지켜보며 딜레마에 빠졌다.
“클라이밍이 워낙 근력을 많이 쓰는 운동이라 마흔이 넘어서는 현상 유지마저 힘들 것 같더라고요.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있던 중 등산학교 강사들끼리 히말라야 드리피카(6,447m)로 고산 등반을 갔던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사실 떠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몰랐으니까 갔다’고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산이었는데 그곳을 그녀는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같이 갔던 강사들이 정말 잘 탄다며 혀를 내둘렀어요. 처음 하는 고산등반이었는데 고산병 증상도 없었고 무척 즐겁게 지내다 왔죠. 한 번 다녀오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클라이밍 선수 때부터 지원을 받았던 ‘코오롱스포츠’에서 흔쾌히 스폰서로 나서줬고 그렇게 고산등반을 시작했어요.”
첫 고산등반 신고식을 훌륭하게 치른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암벽등반가가 고산등반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짧은 시간에 근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클라이밍과는 달리 고산등반은 천천히 에너지를 잘 분배해야 하는 운동이다. 몸에 밴 운동 습관을 믿고 쉽게 도전했다가는 산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모하다는 사람도 많았고 실패를 점치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매일 조깅으로 다진 지구력에 타고난 체력으로 그녀는 처음부터 고산등반을 한 사람처럼 산을 즐겼다. 그렇게 드리피카를 시작으로 2년 동안 에베레스트(8,848m),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27m) 등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 7개를 정복하는 대기록을 세우며 ‘여자 엄홍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 심장박동 수가 1분에 46회로 황영조, 이봉주 선수랑 비슷한 수준이래요. 평지에선 아무리 뛰어도 숨이 안 차요. 중학교 때까지 부안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 가려면 40분 이상 걸어가야 했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걸어 다닌 덕분에 기초체력이 다져진 것 같아요. 고산 적응도 빨라 지금껏 고산병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어요. 건강한 체질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죠.”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래도 따뜻한 어머니의 품
고산등반에서 체력은 기본, 아무리 준비가 잘 돼 있다고 하더라도 날씨의 도움 없이는 정상을 밟을 수 없다. 모든 운들이 적절히 조화가 돼야 정상을 향해 출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히말라야가 신의 영역이라면 신의 총애를 받고 있음이 분명한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5년 첫 등반에서 그녀는 60m 아래로 추락해 심한 골절상을 입었다.
“드리피카에서 60m 아래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어요. 배낭 덕분에 살았죠. 그런데 떨어져서 너무 고통스러운데도 정상이 보이는 거예요.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정상을 찍고 왔어요.”
지난여름, 세계 제2의 고봉이자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고 불리는 K2(8,611m)에서는 하산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함께 간 동료 세 명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때 일을 묻자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시 베이스캠프에는 여러 외국 팀이 와 있었어요. 날씨도 좋았고 연습도 충분히 했기 때문에 모두 즐겁게 성공을 예측했죠. 정상에서 쾌청한 날씨를 만끽하고 하산을 하는데 문제는 거기부터였어요. 각 팀마다 가져오기로 한 만큼 로프를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거예요. 저희가 갖고 있던 80m짜리 로프가 유일했어요. 모두 그 로프 하나를 붙잡고 내려오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죠. 저도 마지막 구간에서 2시간을 헤맸어요. 제가 마지막 도착이라고 생각했는데 베이스캠프에 와보니 아직 셰르파(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티베트계 종족으로 등반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 2명과 우리 대원 3명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다음날 아침까지 대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가 난 곳이 8,100m 지점, 마지막 캠프는 7,900m에 있었다. 불과 200m를 사이에 두고 생과 사가 갈린 것이다.
“8,000m에서 3일을 있었어요. 산소가 희박한 상황에 오래 있다 보니 감정이 굉장히 무뎌지는 거예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헤매다가 나중에 짐을 싸서 산을 내려올 때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이 사람들을 여기다 두고 가는구나’, ‘다시는 못 보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어요.”
슬픔이 채 가시기도 않은 채 마나슬루(8,163m)에 올랐을 때 대원들의 사진을 정상에 묻어주고 왔다. 히말라야에는 그렇게 많은 산악인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자신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없을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고산 등반이 춥고 고생스럽긴 하지만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에요. 히말라야 7,000m에서 보는 파노라마는 정말 아찔하게 아름다워요. 세계 인구의 1%만 볼 수 있는 경치죠. 아까 산에 왜 오르냐고 물으셨죠? 제가 가장 행복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산은 어머니의 품과 같아요. 언제든 돌아오면 포근하게 안아주는 곳이죠.”
현재 상명대 일반대학원 체육학과에 재학중인 그녀는 후학을 양성하거나 고산등반에 도전하고픈 일반인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 물론 당장은 힘들겠지만 결혼도 할 생각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에 오르고 내리며 인생이라는 큰 산을 오르는 그녀의 발자국이 아름답다.
레이디경향 2009년 6월호
"편히 잠드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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