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세 아이들이죠”
불행했던 결혼생활 15년 만에 자살 시도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 폴 미첼이 극찬한 제자, 한국 미용계의 해외유학파 1호, 잡보그잡지가 선정한 세계 20대 헤어드레서 중 최초의 한국인, 1970년대 한국에 최초로 비달사순과 폴 미첼의 섹션 분할 커팅 방식을 소개하면서 세련된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켰던 주인공, 그리고 타고난 미식가이자 음식 예찬론자. 한국 미용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며, 한국 미용사에 큰 획을 남긴 그레이스 리(78).
기자가 그레이스 리의 서울 논현동 자택을 찾은 건, 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붓던 7월 어느 날이었다. “어서 오슈~ 기자양반, 비가 많이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수?” 최근 몇 개월 동안 항암 치료로 인해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음에도, 그녀는 밝고 씩씩했으며 열정적인 에너지가 넘쳤다. 78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이다.
“요즘 컨디션? 아주 좋지! 지금은 암을 이긴 것에 대한 의기양양함도 있지만, 앞으로 건강에 대해서는 좀 겸손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70이 넘으니까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이 없잖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정말 편하고 홀가분해요.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한데, 뭐가 더 필요해요?(웃음) 앞으로는 그동안 먹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러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 중이에요.”
한평생 부족한 것 없는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으며 살아온 그녀의 인생은 언뜻 보면, 마냥 화려하고 행복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레이스 리의 이 같은 성공 뒤에는 쉽게 가늠하기 힘든 깊은 슬픔이 깔려 있었다.
그레이스 리는 35세까지 평범한 가정주부 이경자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물과 불처럼 성격이 맞지 않았던 남편의 외도, 폭언, 그리고 폭행을 참지 못해 결혼 15년 만에 세 아이를 남겨두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당시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치사량의 수면제를 입 안에 털어넣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병원에서는 수면제를 그렇게 많이 먹고도 살아난 사람은 없었다며 놀랍다고 했죠.”
기적처럼 살아난 이후 이경자는 마침내 남편과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 리는 이경자로서의 삶은 고통스럽고 불행했지만, 그러한 마음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삶도 없다고 말한다.
“불행이라는 게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생이 순탄하게 흐르면 성장을 못하니까. 경험이 쌓이고, 생각을 하면서 사람이 성장하잖아요. 불행이 있어야 새로운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고 봐요. 내가 그런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야 ‘진짜 어른’처럼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뉴욕에서 찾은 새로운 이름, ‘그레이스 리’
이혼 후 그레이스 리는 홀홀단신 무일푼으로 무작정 미국행을 선택했다. 왜 미국을 택했는지,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저 막연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빨리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은 마음과, 한국에 두고 온 세 아이를 하루빨리 되찾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에서 만난 가까운 지인이 그녀에게 미용기술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했고, 그게 그녀의 인생을 뒤바꿔놓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미용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의욕은 충만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낯설기만 했던 미국.
‘하루빨리 헤어드레서가 돼서 한국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그녀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처치를 딱하게 여긴 친구의 도움으로 미용사 필기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고, 몇 개월 동안 잠도 거의 자지 못한 채 실기 연습을 한 결과 그토록 원하던 헤어드레서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리고 뉴욕 미용계의 전설로 불리던 미용실에 취직이 되던 날, 드디어 그녀는 ‘이경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그레이스 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뉴욕 최고의 미용실에서 영원한 스승인 폴 미첼을 만났고, 그에게 미용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스는 내 제자 중 가장 기술이 좋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칭찬과 함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돼 힘들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곳 생활이 합리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나는 비록 돈이 없었지만, 마음은 늘 행복하고 좋았어요. 남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해도,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그냥 그 순간을 즐기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웃음).”
한국 미용계 위상을 높이다
뉴욕에서 화려하게 성공을 거둔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세 아이와 재회하면서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된다. 바로 ‘자유로움’이다. 남편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아이들의 양육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던 그녀. 첫째 아들이 대학생, 둘째 딸이 고3, 막내딸이 중3이 되던 해 아이들은 모두 아빠와 같이 살기를 거부했고, 집에서 나와 5년 만에 엄마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미국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세 아이 때문이었어요. 헤어드레서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빨리 아이들을 만나러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고요. 헤어졌던 아이들과 서로 얼싸안으면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울음을 터뜨렸죠.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며 폭언을 일삼던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매일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다니. 정말 원이 없었어요.”
세 아이는 그녀가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일방적인 사랑과 희생이 아닌,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친구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인 것. 다 큰 아들이 연애는 안 하고, 매일 엄마와 붙어 다니는 것을 두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이들은 내가 없는 시간에도 정말 잘 자라주었어요. 감사하죠. 난 아이들의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냥 ‘동지’ 같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죠.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우리 네 명은 서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아요. 정말 특별한 관계죠. 그동안 아이들과 바꿀 수 있을 만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재혼도 안 했어요(웃음).”
한국으로 돌아온 그레이스 리는 해외 유학파 1호 헤어드레서로 연일 매스컴의 취재 대상이 됐고, 그녀가 운영하는 헤어 숍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헤어쇼를 성황리에 열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에 미용사가 단순 기능직으로 멸시를 받던 시절, 그레이스 리는 커트 비용이 아닌 ‘헤어 디자인’ 비용까지 따로 받았을 정도로 자부심이 높았다. 얼굴형에 어울리는 헤어 디자인이 생각나지 않을 경우에는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소문에 부잣집 사모님들까지 매일 그녀의 숍을 찾았다. 하지만 고위층 사모님이라고 절대 특별한 대우를 하지도 않았고, 아부를 하거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위 앞에서는 그 누구도 평등했다. ‘실력’으로 손님을 다시 찾게 만드는 것, 이게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그레이스 리의 이 같은 파격적인 사고방식이 당시 한국 미용인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72세에 통영에서 제3의 인생을 찾다!
경남 통영을 여행하던 그레이스 리는 그곳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그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아들과 딸들이 “말도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미 그녀는 통영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우연한 여행길에 새로운 인생의 실마리를 잡고, 삶이 통째로 뒤집히는 사건. 어느 소설가는 이를 두고 ‘우연의 폭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단다.
“제가 사실 음식과 요리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통영은 아름다운 경치는 둘째치고, 서울에서는 구경해보기도 힘든 맛깔스러운 해산물이 천지에 깔렸잖아요. 그걸 두고 어떻게 다시 서울에 올라갑니까?(웃음)”
내친김에 통영에 ‘중국요리 이선생’이라는 중국요리 음식점도 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주위 사람들도 직접 명함을 돌리며 음식점을 홍보하는 그녀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이런 노력 덕분인지, 음식점은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찾는 통영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난 음식 장사를 하면 남는 게 없어요. 무슨 요리든 재료는 최고급을 쓰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맛있게 먹으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어요. 나는 맛있는 거 먹으러 비행기 타고 해외를 나가는 사람이에요. 그 정도로 요리를 좋아하죠. 음식에는 그 나라의 철학이 담겨 있어요. 사람들과 음식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생활수준도 금방 파악이 될 정도예요. 음식만큼 훌륭한 외교 수단도 없다고 생각해요(웃음).”
유방암, 위암, 대장암을 이긴 78세 청춘
그레이스 리는 현재 대장암 항암치료 마지막 단계를 받고 있는 중이다. 2001년에는 유방암 수술을, 2007년 2월에는 위암 수술을, 2008년 10월에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세 번의 암투병에도 삶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
“난 암과의 싸움에서 늘 이겼어요. 일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거든요. 때론 암 덩어리에 겁을 주면서, 혹은 달래면서 그렇게 암세포들을 내 몸에서 쫓아냈어요. 그리고 78년 평생 좋아하는 술도 맘껏 먹고, 담배도 맘껏 피우면서 살았는데 지금까지 살았으면 잘살았다고 생각해요.”
78년 동안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왔던 그녀에게 가장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을 꼽아달라고 전했다. 그랬더니 가장 잘한 일은 ‘이혼’이라고 말한다.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테니까요. 저는 내 인생을 스스로 바꿨죠.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절대 ‘이혼’은 하지 말라고 말해요. 아이러니하죠? 저처럼 인생을 과감히 개척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찬성하겠어요. 하지만 웬만하면 마음을 바꿔서 잘 사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죠.”
최근 그녀는 평범한 주부 이경자에서 지금의 그레이스 리가 되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스토리를 「오늘이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다」라는 책을 통해 공개했다.
“제가 젊었을 때 불행하게 살았잖아요. 저처럼 결혼생활과 인생이 고달프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 책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보람된 일이 뭐가 있겠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잘한 일은 있지만, 후회한 일은 없단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녀의 인생 순간순간이 위기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작 본인은 그런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지 않았다.
“전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하면서 살았어요. 내 인생에 더 이상 미련도 후회도 없죠. 어떤 역경이 있어도 모두 딛고 일어났어요. 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인생을 즐겼어요.”
그녀는 ‘즐거운 소풍을 떠날 준비는 다 되었다. 내 장례식은 축제가 되게 하리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 땅에서 원없이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기 때문에 생에 대한 미련은 없다.
다만, 암을 세 번씩이나 이기고 얻은 ‘보너스’ 같은 삶을 앞으로는 하루하루 귀하게 쓰고 싶은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한다. ‘어떤 삶이 내게 남아 있든, 오늘이 내 삶의 클라이맥스’라고.
레이디경향 200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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