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 한국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던 김 추기경은 “품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87세를 일기로 지난 2월 16일 선종했다. “내가 잘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는 것이 바보지. 그런 식으로 보면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그린 자화상 ‘바보야’에 대한 설명 끝에 덧붙인 말이다. 당시 그는 “자화상 안의 내 모습이 바보같이 보인다”며 아이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랑과 나눔, 희생 남기고 마지막 가는 길
20년 전 김수환 추기경은 세계성체대회에서 ‘뇌사시 안구각막 기증’ 의사를 처음 밝혔다. 천주교의 사랑의 정신이 이웃으로 전해지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이를 계기로 장기기증과 해외 원조사업 등을 전담하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10월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을 때, 추기경의 의식이 회복된 상태에서 기증 의사를 다시 물었고, 기력이 떨어졌음에도 그는 분명하게 기증 의사를 밝혔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기기증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로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전화 오는 횟수가 세 배나 늘었고, 온·오프라인 방문 신청자들도 늘었다. 이뿐 아니라 명동성당 앞에 차려진 장기기증 등록 부스에는 하루 동안 100명이 넘는 시민이 찾아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연예인들도 이 뜻에 동참했다. 가수 장윤정을 비롯해 박현빈, 윙크, V.O.S, 서인영, 박정아, 쥬얼리S, 탤런트 정한용, 개그맨 양원경 등 스타 연예인 10여 명이 지난 2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사단법인 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KOLEC)를 통해 각막 및 조직 기증 서약을 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김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5~6년 동안 장사를 배워 25세에 장가가리라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막내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는 그 소망대로 친형 동환과 함께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그린 자화상 ‘바보야’와 ‘옛집’
그는 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하던 중 강제 징집되어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성심대학(지금의 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해 4년 뒤인 1951년 사제로 서품됐다. 이후 안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대구교구장 주교의 비서를 지냈고, 독일 유학 후에는 가톨릭시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66년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고, 2년 후에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한국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된 건 1969년의 일이다. 당시 그는 전 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인 47세였다.
민주화의 버팀목이 되다
한국 교회에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당시 주교였던 그는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해고자 전원이 복직되는 결과를 얻었다.
김 추기경은 1970년대 유신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을 강력 비난하면서 역사 현실에 동참했다. 그가 자리 잡았던 명동성당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지였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말에 그는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단호히 말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위해 항상 기도했다.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 넘어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도 관련이 있었다. 세 번 십자 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할 때마다 김 추기경은 언제나 세 번째 십자 표시는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통일에 대비하고,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했다. 그해 시작된 ‘민족화해 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해 싸웠다. 생전의 그는 이렇게 말해왔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40만명의 사람들은 행렬을 지켜 경건하게 조문했다.
평생 무소유의 삶 살아
김수환 추기경은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다 하늘로 돌아갔다. 그의 유품에는 그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 중 다섯 점에 달하는 안경은 오래 사용해 군데군데가 부러져 있었고,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인 ‘성작’과 그 받침인 ‘성반’은 금속 재질이었지만 광택이 거의 사라지고 녹슨 부분마저 있었다. 추기경의 지위라면 많은 선물과 화려한 제구를 받게 되지만, 그는 예전부터 사용했던 소박하고 검소한 제구만 고집해온 것이다. 아이들이나 국내외 신자, 지인들에게 받은 다양한 모양의 열쇠고리들도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추기경실에는 선물로 받은 그림과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는데, 그 중 한 장애아가 크레파스로 김 추기경을 그린 그림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바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는 김 추기경의 사목 표어였다. 시편 23장 1절의 말씀인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는 김 추기경이 가장 좋아한 성경 구절 중 하나였다. 가진 것 없어도 행복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잘 대변해주는 구절이다.
레이디경향 2009년 3월호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각장애 아동들에게 미술 수업 지원하는 엄정순 화가 (0) | 2009.07.21 |
---|---|
2년 동안 2천만원 기부, 선행 이어가는 정미선 아나운서 (0) | 2009.07.21 |
나눔의 삶’ 실천하는 한세대학교 김성혜 총장 (0) | 2009.07.20 |
2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 나눠온 정애리의 끝없는 사랑 (0) | 2009.07.20 |
정혜영-션 부부, 최고의 맘&대디에 선정 (0) | 2009.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