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아이들은 모두 창의적인 인격체예요.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존중해야죠” |
‘좋은 눈을 가진 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포르투갈 속담이 있다. 살면서 갖게 되는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는 ‘잘’ 보고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미지 홍수의 시대, 보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눈’만을 믿는다. 하지만 삶 곳곳에 묻어 있는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볼 때 더 선명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
서울의 중심지, 북촌 한옥마을로 올라가는 삼청동 길을 따라가다 보면 주택가 한편에 자리한 갤러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의 눈’이라고 쓰인 주황색 간판이 눈길을 끄는 이곳은 시각장애인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국내 최초 시각장애 미술 전용 갤러리다.
조촐하지만 단정한 전시장에는 찰흙, 조합토 등으로 만든 올망졸망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독특하면서도 정교한 이 작품들은 한국과 일본의 시각장애 아동 30여 명이 뽐낸 솜씨다. 시각장애인들의 독창적인 감각이 발현된 이곳의 작품들은 관람하는 이에게 새로운 예술의 경험을 선사한다.
많은 사람들은 ‘앞도 못 보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만들 수 있어?’라고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있어 반드시 ‘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욕구는 있게 마련이고 여러 감각으로 받아들인 자극은 다양한 방법으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에는 사진가, 화가, 전문 큐레이터 등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으며 활동하는 장애인 예술가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만드는 것도 못할 것이다’라는 1차적 편견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제대로 된 미술 관람 기회는 물론,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미술 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누구나 갖고 있는 표현의 욕구, 장애는 결핍 아닌 또 다른 가능성
이런 열악한 현실을 딛고 시각장애 아동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그려보일 수 있게 된 데는 엄정순씨(47)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화가이자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 회장인 엄정순씨는 10년 전, 우연히 맹아 학교 프로젝트에 참석한 뒤 장애 아동들의 독특한 감각에 매료되어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술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도구잖아요. 시각장애 아동들이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드러내 보이지 못했을 뿐, 막상 ‘이야기해봐’ 하고 열어놓으니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들의 표현이 새롭기도 하고 흥미로웠어요. 만들고 싶고, 나타내고 싶은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결심은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특수교육 전문가, 화가, 미술 작가, 문화인 등 그녀와 뜻을 함께할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 우리들의 눈’을 발족하고 맹학교 미술 수업에 뛰어들었다. 매년 아이들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고 장애 아동들의 미술관 투어, 점자 촉각 그림책 제작에도 힘을 쏟고 있다.
“맹학교에서도 미술 시간은 그냥 노는 시간일 뿐이었어요. 다른 수업으로 대체하거나 대충 때우며 넘어갔죠. 하지만 시각장애인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이 시각적 표현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엄정순씨는 처음 시각장애 아동들의 세계를 접한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도, ‘아이들’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다른 감각을 가진 창의적인 인격체로 동등하게 존중한다. 항상 새로움을,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아티스트’로 살아와서인지 아이들의 장애가 결핍이 아닌, 창의적인 가능성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아무래도 사물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 독특한 감각이 있어요. 장애를 장애로만 바라보면 한없이 무능하게 느껴지고 힘이 없지만, 다르게 보면 가장 좋은 재능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사실 ‘모든 창의성은 콤플렉스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이들의 독특한 감각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래서 미술 수업을 할 때는 편견을 버리고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 아이가 본 사물에 대해 같은 눈으로, 마음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수업을 한다’,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함께 대화하고 느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엄정순씨는 이런 자세가 바로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10년 동안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라고 평가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도와야겠다는 따뜻한 마음만이었다면 이렇게 훌륭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거예요. 간혹 ‘좋은 일을 한다’며 칭찬해주는 분들도 있는데 저희는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회가 만들어낸 ‘장애’라는 차별화된 명칭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창의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엄정순씨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이력이 화려하다. 편안하고 수준 높은 미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미술 분야에서 전문 영역을 갖춘 이들과 발을 맞추고 있다. 또, 현재까지 3개 학교 7개 반에서 수고하는 선생님들에게는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고 해서 아이들이 작품을 만들 때 많이 도와주지 말 것’을 주문한단다. 아이들이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재료에 대한 정보와 표현 방법을 알려주는 것 정도가 엄정순씨가 생각하는 최고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이 ‘마음의 눈’ 뜰 수 있도록, 다시 세우는 10년
지난해 ‘올해의 어린이 문학’ 그림책 부문 1위에 선정되기도 한 점차 촉각 책 「점이 모여 모여」를 펴낸 바 있는 엄정순씨는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장애인들에게도 동등한 세상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예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처음으로 시각장애 아동들의 작품을 전시하던 날 또래 아이들이 전시장을 관람하면서 ‘와, 얘네들도 뭔가를 느끼네’라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에요. ‘보이지 않으니까 모를 것이다’라는. 우리가 항상 똑같이 생각하고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거창한 구호만 있을 뿐이잖아요. 예술의 에너지로 시각장애 아동들에게는 자신감과 고유의 세계를 기르게 해주고, 비장애인들에게는 그들을 인정하게끔 할 수 있어요.”
미술 수업을 받으며 한 학기에 적어도 두세 점 이상의 결과물을 완성한 아동들은 세상 사람들과 작품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눈에 보이는 성취를 이루게 되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도 저절로 따라온다. 미술 수업의 성과는 꼭 예술적 재능이 있는 장애 아동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평소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아이들은 수업을 통해 세상을 향해 닫혀 있던 마음을 열었다.
“보통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중복 장애로 발전하기 쉬워요. 학교 선생님께 들었는데 시각장애에 자폐를 앓던 한 친구는 미술수업을 들은지 2년여 만에 다른 수업 시간에 반응을 보였대요. 주변 사람들과 농담까지 나눌 정도로 밝아졌고요.”
물론 엄정순씨의 미술 수업이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비용도 품도 많이 드는 작업인지라 처음에는 해당 학교에서도 꺼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앞도 못 보는 아이들이 뭘 안다고…’라는 생각에 괜한 헛수고가 아닌지 우려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협회의 미술 교육 노하우를 배워가려는 곳도 생겨났다.
10년 동안 지원한 충주 성모학교에서는 한 선생님이 발 벗고 나서 수업 내용을 배워갔고, 이제는 자체적으로 미술 교육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엄정순씨가 뿌린 씨앗이 비바람을 이겨내고 싹을 틔워 이제는 현장에서 결실을 맺게 된 셈이다.
이제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정리한 미술 교육 콘텐츠를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것이 엄정순씨가 해야 할 일이다. 전국 12개 맹학교는 물론 시각장애 예술 활동을 하고자 하는 모든 곳에 정보를 제공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솔직히 10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 이제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 되었네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러모로 감사한 것도 많아요. 그때 막연히 꿈꾸던 것들을 이제 거의 이룬 것 같아요.
점자책도 냈고, 전시회도 꾸준히 열고, 작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용 갤러리도 만들었고요. 이제는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해야죠. 우선 갤러리를 대안 공간처럼 운영하면서 시각장애 아동들이 세상과 만나는 길을 더 넓혀주려고 해요.”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10년이 꿈처럼 소중하다는 엄정순 화가.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다시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 듯이 그녀의 의미 있는 점들이 모여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레이디경향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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