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년간 묵묵히 사랑을 실천해온 부부가 있다. 연예계 대표적인 잉꼬부부 최불암·김민자 부부다. 한국복지재단과 ‘사랑의 달팽이’를 통해 실천한 사랑, 그리고 40년간 잉꼬부부로 살아온 비결을 들어본다.
최불암·김민자 부부가 함께 공식석상에 나서는 일은 드물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최불암과 달리 김민자는 지난 2000년 SBS-TV 드라마 ‘순자’를 마지막으로 연기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에 한두 번, 이들의 모습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바로 난청인들을 후원하는 단체인 ‘사랑의 달팽이’ 행사를 통해서다. 김민자는 5년 전부터 ‘사랑의 달팽이’ 회장을 맡아 홍보와 후원자 개발에 힘쓰고 있다. 1985년부터 한국복지재단을 통해 봉사와 나눔을 베풀어온 최불암 역시 ‘사랑의 달팽이’ 행사가 있을 때면 언제나 달려와 힘이 되어준다.
난청인들에게 소리를 찾아주는 일, 보람 있어
김민자가 청각 장애인들의 아픔을 공유하게 된 건 5년 전 아주대학교 박기현 의료원장으로부터 “인간이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경우, 뇌 발달의 저하를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였다. 그동안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난청과 청각장애의 아픔을 듣고 그녀는 이들을 돕는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많아요. 저뿐 아니라 누구든 어느 한쪽에서는 장애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장애일 뿐이죠. 겉으로 드러나는 장애로는 지체장애, 시각장애 등이 있지만, 이 중에서도 청각장애는 겪지 않으면 모를 굉장히 큰 아픔이 있어요. 겉모습은 멀쩡한데 귀가 들리지 않으니, 대화를 피하게 되고, 소외되고, 떳떳하게 살지 못해요.”
‘사랑의 달팽이’는 난청인들에게 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후원하는 단체다. 소리를 다시 찾은 이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핵심 사업. 난청은 유전될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선천성 난청의 경우 뇌 발달 저하로 지적장애 등과 같이 복합장애로 이어지기 때문에 늦기 전에 수술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단체에서는 1차적으로 선천성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통해 소리를 찾아주고 있는데, 1년 동안 26명의 아이들이 소리를 되찾았다.
“요즘은 저출산 시대라 아이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가요. 과학이 많이 발달되어 난청 아이들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정상적인 일원으로 사회에 내보낸다는 것이 큰 보람이에요.”
‘사랑의 달팽이’에서는 인공와우 수술 후 언어치료를 받고 언어에 대한 변별력을 가진 아이들에게 클라리넷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이들은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이 되어 무대에서 공연도 하는데, 김민자는 이를 가장 보람된 순간으로 꼽았다.
“평생 소리를 못 듣던 아이들이 수술 후 악기를 연주해요. 대단하지 않나요? 관악기 중 인간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고 폭넓은 표현력과 풍부한 음색을 가진 악기가 클라리넷이래요. 이 아이들이 정기 연주회도 하고 도네이션 행사에서도 연주를 해요. 어떤 분들은 공연을 보다가 감동을 받아 울기도 하죠. 아이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넘쳐요. 소리가 들리고, 게다가 악기까지 연주하게 되니 자신도 굉장히 감격스러울 거예요.”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그녀는 이 같은 감동적인 일화가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그녀에게 봉사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정리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어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이제는 여유를 갖고 주변도 보고 상대방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부족한 힘이지만 더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우리 부부는 기본적으로 받은 혜택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잉꼬부부? 얼굴이 알려진 만큼 열심히 살아야
“사람들은 저희가 긴 세월 잘 가고 있으니까 잉꼬부부라고 불러주는 것 같아요. 괜히 얼굴을 내밀고 사는 사람인가요? 공인으로서 책임 있게 살아야 해요. 모범까지는 아니지만 우리같이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이 쉽게 사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살아줘야 한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어요.”
물론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니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마음은 서로 깊을 것이다. 그래도 잉꼬부부가 되기 위한 왕도는 ‘노력’ 이외에는 없었다. 그녀는 요즘 세대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점이 많다.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참고 인내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어요. 아무리 자유분방한 배우 생활을 해도 그런 사상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기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우리는 이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후배들을 보면 쉽게 결정하고 너무 빨리 끝내버려 안타까워요. 다들 사정이 있겠죠. 그래도 선배로서 바라볼 때 이혼이 과연 옳은 판단이었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문제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이 한뜻으로 맞춰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 있어도 시간이 가고, 자고 일어나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몇 밤만 자고 일어나봐라, 가장 큰 것을 생각하라고 조언하고 싶지만, 내가 너무 바보 같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결혼 생활 40년. 숨소리만 들어도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는 세월이다. 요즘도 부부싸움을 하는지 물으니 “그런 다툼도 없으면 재미없다”며 웃는다.
“40년 정도 살아봐요. 척하면 ‘어, 저거구나’ 싶어요. 그래도 전혀 안 싸우는 건 아니에요. 나이 먹으면 아집이 생겨요. 서로 고집을 부리다가 다툼이 생기죠. 그런 다툼도 없으면 재미없지 않나요?”
누가 이기냐는 질문에는 “무승부”라고 답한다. 그래도 길게는 싸우지 않는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김민자는 동료 배우로서 최불암을 평가한다. 배우로서 그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나는 배우니까’ 하는 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배우인데 너무 소박하지 않냐고 해요. 남편은 본성이 화려한 사람은 아니에요. 세상에 알려진 부분이 있으니까 많이 조심하는 거죠. 한번쯤은 안 그래도 될 텐데, 옆에서 보면 대단하다 싶을 때가 있어요. 자기 일에 철저하고, 다음날 방송이 있으면 전날은 친구를 만나서 술을 먹거나 하는 일은 안 하죠.”
디지털 카메라 이용해 손녀 사진 찍는 것이 취미
김민자는 나이가 들면서 버리고, 비우고자 하는 생각이 많아졌다고 한다. 점점 많아지는 욕심을 이제는 버릴 때라는 것.
"나이 먹으면서 삶의 방향이 많이 달라져요. 지금은 그럴 찰나예요. 원래 욕심이 없는 사람인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욕심이 생겼죠. 어느 순간에 이 생을 접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야 하는 길목에 와 있기 때문에 뭔가 가벼워지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기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녀는 설명 대신 “나이 들어봐”라며 웃는다. 가장 버려지지 않은 욕심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솔직히 제가 했던 일(연기)이죠. 일 안 한 지 꽤 됐거든요. 일을 하고 있었을 때도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뒤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이 들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고 거절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일과 멀어졌어요.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서 욕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죠.”
‘버리자’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그녀도 많은 고비를 겪었다. 여배우로서 아름다움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거나 갱년기가 왔을 때, 순간순간 좌절감이 들었을 때다.
“배우이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그 상실감은 좀 더 클 거예요. 참 속상할 때가 많았죠. 고비마다 순간순간 정신적으로 슬럼프에 빠졌어요. 다행히 그 수렁에 푹 빠졌어도 금방 이겨낼 수 있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저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고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녀는 고비를 넘기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울해질 때마다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고, 갱년기와 우울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는 것도 필요하단다.
“저는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운동을 많이 했고, 좋아하는 영화도 많이 보러 다녔어요. 영화관에 가지 못하면 인터넷을 통해 봤고요. ‘나는 이럴 때 무엇을 하면 해소되더라’ 하는 취미생활이 있어야 해요. 요즘에는 TV나 책을 통해서 갱년기나 우울증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으니까 의지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어요.”
그녀는 요즘 보기만 해도 흐뭇한 웃음이 나는 손녀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졌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컴퓨터로 불러와서 보고 인화하는 번거로운 작업까지 거뜬히 해낸다.
“인터넷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해요. 절대 어렵지 않아요. 내 나이만큼만 할 수 있으면 돼요. 얼마 전에는 손녀 사진이 너무 많아 컴퓨터 용량이 넘쳐서 전자상가에 USB를 사러 갔어요. 그런데 USB로는 안 되고 외장 하드가 있어야 한다더군요. 거기까지는 상식이 없어서 안 되겠다고 하고 말았어요.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에 취미를 붙여보니까 좋아요. 이제 딸도 시집보냈으니까 본격적으로 해봐야죠.”
김민자의 사진 솜씨는 전문가급. 한창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전도 몇번 마련한 적이 있을 정도로 수준급이다. 어쩐지 그녀는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캐논에서 좋은 카메라가 나왔는데, 화소가 높아서…”라며 전문적인 이야기도 줄줄 이어간다. 기자가 놀라니 “그냥 취미로 아이 사진이나 찍어주는 것뿐”이라며 겸손해한다.
즐거운 취미생활에 푹 빠진 그녀지만, 최근 안구건조증이 와서 수시로 인공눈물을 넣어줘야 하고 오랫동안 컴퓨터를 보지 못하는 점은 안타깝다.
“나이가 드니 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저에게 맞게 조금씩 해야 하죠. 어릴 때 어른들이 다 때가 있다며 공부하라는 말을 하잖아요. 정말 맞아요. 그래도 그게 사는 재미예요. 그런 취미생활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요.”
김민자가 최근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는 ‘내조의 여왕’. 얼마나 재미있는지 종영을 안타까워 할 정도다. 예쁘고 연기 잘하는 후배들이 많아진 건 선배로서 정말 흐뭇한 일이다. 그러나 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요즘은 너무 치열해요. 제가 연기할 때는 그런 경쟁이 없었는데, 후배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가여워요. 그러니 이상한 사고가 나는 거 아니겠어요. 모두 다 성공할 수는 없는 건데, 왜 다 1등만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거든요. 선배로서 무척 가슴이 아파요.”
김민자는 이야기 중 “받은 게 너무 많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려웠던 시절 방송국에서 전속금을 받은 것도 감사하고, 평탄히 배우 생활을 한 것도 감사하고,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또 감사하다.
김민자가 봉사에 힘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큰 기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각자 마음의 빚을 갚아나가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난청인에게 소리를 찾아주는 ‘사랑의 달팽이’와 함께해요
우리은행 1005-301-154353 (예금주: 사랑의 달팽이)
레이디경향 200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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