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 한국. 한국을 빛낸 이들

주한 카타르 대사 부인 나오미 마키의 ‘한국 찬가’

maind 2009. 7. 21. 09:29

 

 

“한국의 젊은세대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야해요”

그녀를 보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 새삼 신기하다. 남부러울 것 없던 부잣집 일본 아가씨가 카타르 외교관을 만나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에까지 왔다. 그녀는 이곳에서 강한 영감을 느끼고 앨범을 만들었다. 아무런 연도 없는 한국에서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를 하게 된다. 주한 카타르 대사 부인인 나오미 마키의 이야기다.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


나오미 마키(48)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한국인인 기자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녀는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문화를 느끼는 감정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카타르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한국 문화에 빠져 사는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과연 우리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오미는 남편인 알미다디 현 주한 카타르 대사와 도쿄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하메드 세이프 알미다디(Ahmed Saif Al-Midhadi) 대사가 카타르 해외 부임 초년생 외교관으로서 주일 대사로 발령받은 지 3일 만의 일이었다. 화가이자 성악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갤러리 오프닝 파티를 열었고 그는 그곳에 초청받아 온 게스트였다.

“저는 대부분 오감에 의지해 살아왔어요. 남편과의 만남도 그런 부분이 있었죠. 강한 뭔가를 느꼈어요. 그를 본 순간 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어요. 머리가 하얗게 센 그가 앉아 있고 그 주변에 몇 명의 아이들이 서 있는 모습이요. 현재의 모습을 그때 본 건지도 몰라요(웃음).”

부부는 다복하게 2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진짜 미래의 모습을 본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느낌이 통한 건 사실이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쉽게 결혼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미국과 영국을 거쳐 한국으로 와 4년째 생활하고 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편이었죠.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 땅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굉장한 걸 알았어요.”

특히 한강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영감을 흔들어 깨울 정도로 강한 기운을 느꼈단다. 한강을 설명하면서 그녀는 굉장히 흥분된 모습이었다. 두 팔을 휘저으며 온몸으로 한강을 표현했다.

“저는 런던이나 뉴욕에서 꽤 오랜 생활을 했어요. 뉴욕에는 허드슨 강이 있고 런던에는 템스 강이 있지만 한강에 비할 바가 못 돼요. 한강처럼 굴곡을 이루며 넘치는 생명력으로 흐르는 강은 본 적이 없어요. 전 그곳에서 강한 에너지, 영원한 생명의 흐름을 느꼈어요.”

화가이자 성악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풍부한 예술적 감성을 지녔다. 영감을 받으면 가슴 속에서 폭발할 듯 뭔가가 솟구친다. 그래서 그림이나 피아노로 그것을 표현해낸다. 그녀는 일본 쇼비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7년간 고전음악을 배웠다. 그렇게 한국에서 받은 영감으로 열한 곡을 만들었고 앨범 「Dear Beautiful Moment」가 탄생됐다. 그녀는 한국에서 정식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것이다. 주한 외국 대사 부인이 국내에서 음반을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앨범의 세 번째 곡인 ‘엘레지’가 한강을 표현한 곡이에요. 피아노뿐만 아니라 해금을 쓰기도 했어요. 이 또한 매력적인 한국 전통 악기죠. 우리네 인생은 아주 짧아요. 그 짧은 순간에 희로애락을 느끼죠. 해금은 우리 인생을 닮았어요. 아주 단순한 멜로디지만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랄까요?”

한국의 음악을 배우고 싶어 전통 연주회를 열심히 다닌 결과 해금의 소리를 이해하게 됐다. 이 멜로디는 꼭 해금으로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강과의 만남, 해금과의 만남은 모두 인연 같아요. 제 인생의 새로운 문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죠.”
그녀는 갑자기 기자에게 ‘율란’이라는 한국 전통 과자를 알고 있느냐 물었다. 율란? ‘뮬란’이 아니고?
“개성 지방의 전통 과자라고 해요. 과자를 만드는 과정이 또 예술이랍니다. 밤을 찐 다음에 다져서 꿀과 섞어요. 그리고 밤의 형태로 다시 만들어요. 앞은 볼록, 뒤는 오목하게 진짜 밤처럼. 그리고 실제 밤의 아랫부분은 딱딱한 껍데기로 돼 있잖아요? 그 부분은 시나몬을 찍어서 완성하죠.”

그녀는 율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은 태어나서 사춘기를 거쳐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여자의 일생을 떠올리게 했단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YULAN(栗卵)’이다. 여성을 표현한 곡은 또 있다. ‘Free as a Bird’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한국 여성에게 바치는 노래란다.

“제가 만난 한국의 커리어우먼들은 굉장히 순수하고 온화한 사람들이었어요. 왜 가끔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라고 해서 무리하게 강한 척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한국 여성들은 그렇지 않아요. 성실하고 자연스럽죠. 아직까지 한국은 남성 위주 사회지만 커리어로 승부하는 한국 여성들을 보며 늘 감탄해요.”

Free as a Bird. 사회적 관념, 제도의 굴레를 지고도 열심히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을 위한 찬가란다. 그녀는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음(音)’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만의 재능이 한 가지 있어요. 풍경과 그 풍경에 맞는 음을 오감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요. 예를 들어 드라마 ‘겨울연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드라마이고 반대로 이 나라가 아니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겨울연가’의 영상미와 그에 맞는 서정적인 음악의 조화에 높은 점수를 줬다.



한국, 어쨌든 굉장한 나라!


나오미가 처음으로 한국을 피아노로 표현하고자 하는 발상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그녀는 앞에 언급했던 해금은 물론 가야금, 장구 등을 배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민요를 접할 수 있었다.

“인간문화재 명창이 부르는 ‘한 오백년’을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너무나 멋지고 흡사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을 때 느꼈던 비슷한 애절함이 전해졌죠. 그게 바로 한(恨)이라는 정서겠죠.”

한국인 특유의 한과 정이 들어간 ‘한 오백년’을 자신만의 레퍼토리로 만들고 싶었다. 직접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고 발음도 연습했다. 이것이 한국을 피아노로 표현하는 첫 번째 작업이었다.

“노래를 직접 불러보니 내 몸 안에 한강이 흐른다고 느껴졌어요. 한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 밑에 영원한 사랑을 느꼈고 비로소 나의 ‘한 오백년’이 됐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점점 한국을 피아노 연주에 담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한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노래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어의 멋까지도 알게 됐다. 그녀는 ‘안녕’이라는 인사말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지 기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녕이란 말을 한자로 쓰면 ‘安寧’이죠. 편안할 안, 편안할 녕. 한국인들은 서로 가볍게 ‘안녕!’ 하지요? 발음이 귀엽지만 속뜻은 ‘편안한가?’ 하고 묻고 있는 거예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들어 있어요. 얼마나 멋진 인사말이에요?”
그녀는 또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한국어 어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저는 최근에 한국어로 ‘사람’과 ‘사랑’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죠. 한국에 이렇게 멋진 문화가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걸로 풀렸어요. ‘사람’과 ‘사랑’…”

 

 

 

 

자국민이라면 쉽게 지나쳐버릴 만한 것도 그녀에게는 늘 감동이다. 그녀를 통해 우리 문화를 바로 보는 과정은 참 흥미롭다. 그녀는 3년째 호남 살풀이 이수자인 양성희 선생에게서 살풀이와 태평무를 배우고 있다.

“한국 춤은 겉으로 볼 때 손을 이용하는 춤 같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하체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는지 몰라요. 합! 하고 기합을 넣고 하체에 힘을 주면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가죠. 절대 인위적으로 올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한국 무용은 시작하자마자 땀이 비 오듯 하죠. 알고 보면 굉장히 격한 춤입니다.”

그녀는 직접 살풀이의 동작을 보여주며 일본 춤과 한국 춤을 비교해 줬다. 잠깐 보아도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어떤 나라에 가더라도 가장 먼저 전통적인 세계를 찾아봅니다. 왜냐하면 전통이라는 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겁의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전통입니다. 그 나라의 핵이지요. 한가운데 깊이 박혀 있는 그 핵에 가까워지고 오감을 통해 그 나라를 이해하고 싶어요.”

그녀는 타고난 대사 부인이 아닐까. 여러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며 적응하는 것이 대사 부인의 첫 번째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저와 서쪽 끝에 있는 남편이 만나 결혼을 했어요. 완전히 다른 환경과 문화, 역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죠. 그렇지만 결국 거기에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어요. 희로애락 그리고 사랑에 흔들리는 인간. 결국 언어는 달라도 모두 같아요.”

지금까지 그녀는 고국이었던 일본의 가치관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로 가면 그곳의 가치관이 흡수되고 나의 것이 된다. 그것은 고정 관념을 깨는 작업이며 그렇게 스스로 점점 성장해간다. 4년간의 짧은 한국 생활이었지만 많은 것을 얻었다.

“내년부터는 남편이 모스크바에 주재하게 됐어요. 이제 며칠 후면 남편이 먼저 떠나고 저는 아이들의 학교와 여기 짐들을 정리하고 따라가죠. 그렇지만 저는 한국인과의 헤어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 서울로 날아올 거예요.”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서울까지 8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좋은 무대가 있다면 가볍게 날아올 기세다.


“제가 외국인이라 한국 전통에 더욱 빠졌는지도 모르죠. 실제로 생활하는 사람은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겁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국인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알려주는 기회를 많이 갖고 싶어요.”

그녀의 앨범의 마지막 곡 제목은 ‘Overture’, 서곡이라는 뜻이다. 주로 오페라 등의 첫 부분에 연주돼 곡의 도입을 돕는 노래다. 그러나 그녀의 앨범에는 첫 번째 곡이 아니라 마지막 곡이다. 이 앨범으로 한국과 마지막 인연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4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한국을 사랑했다고 자부합니다. 한 명의 한국인이라도 제 피아노 연주를 듣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알미다디 대사 부인’이라는 호칭보다 ‘피아니스트 나오미 마키’가 더 어울린다. 한국 문화 전도사, 피아니스트 나오미 마키. 그녀는 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 서 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려 한다. 서곡이 연주된다. 한국과의 진짜 인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강처럼 굴곡을 이루며 넘치는 생명력으로 흐르는 강은 본 적이 없어요. 전 그곳에서 강한 에너지, 영원한 생명의 흐름을 느꼈어요”

 

레이디경향 2008년 11월호